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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저널]"충분히 좋은 엄마"와 사회민주주의 정치철학:헤겔<법철학>과 정신분석학,사민주의 - 홍준기

작성자 박서현

작성일 2014.10.20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엄마의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들은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해주며 심리적, 경제적 안정감을 제공해주는 윤리적 국가가 필요하다. 헤겔은 근대 시민사회의 발흥과 더불어 생겨나는 무수한 문제들, 빈부 격차, 자유와 평등의 유린, 천민의 발생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국가’의 존재를 역설하고 그것을 위한 이론적 기초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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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한편 대다수 자유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이사야 벌린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양자의 이론을 모두 ‘전체주의나 독재로 이끄는 적극적 자유의 주창자 ’로 간주한다. 하지만 헤겔과 마르크스 이론을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과장이거나 아니면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헤겔의 국가론이 갖는 사회민주주의적 의미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결국 이사야 벌린이 하고 싶은 말은 자유는 ’궁극적으로’ 소극적 자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며 소극적 자유의 보장(즉 강자의 자유)의 보장을 위해서라면 국가와 사회공동체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헤겔 :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의 선구자

헤겔의 『법철학』과 그 책에서 제시된 국가론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다음과 같은 논제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그냥 넘어가고자 한다.

잘 알고 있듯이 (신)자유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국가를 억압적 기구로 간주하며, 따라서 국가의 최소 개입 혹은 국가의 철폐를 주장한다. 반면 헤겔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시민사회가 야기하는 여러 문제들(즉 소외, 빈곤,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심급으로서 ‘ 보편적 ’ 이고 ‘ 윤리적 ’ 인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국가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철저하게 철학적, 사회과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그리고 ‘성공한’ 철학자이며, ‘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의 진정한 선구자 ’이다.

『법철학』을 출간(1821년)한 이후 오랫동안 헤겔은 ‘프러시아 국가를 옹호한 반동 철학자’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청년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 역시 헤겔의 국가론을 비판하는 흐름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변증법'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헤겔의 『법철학』은 주목받지 못했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독일의 저명한 헤겔 연구자인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가 지적했듯이, 헤겔의 많은 저서들 중, 예컨대 "논리학"이나 『정신현상학』이 아니라, 『법철학』이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이 되었다는 것은 진정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헤겔이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보편적 , 사회적 국가 혹은 인륜적 국가(즉 윤리적 국가)가 다름 아닌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을 통해 실제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존하는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 완벽하게 이상적인 국가라는 뜻은 아니다).

헤겔이 사용한 인륜적(sittlich)이라는 표현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낡은 느낌을 준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독일인들에게 조차 인륜적 국가(der sittliche Staat)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들린다. 따라서 영어나 프랑스로 번역할 때 역자들은 헤겔이 말하는 인륜적 국가를‘윤리적(ethical/ethique) 국가’로 번역한다. 나 역시 그 점을 고려해 헤겔이 말하는 ‘인륜적’이라는 표현을 주로 혹은 종종 ‘ 윤리적 ’이라는 용어로 번역해 사용하고자 한다.

헤겔이 말하는 Sitte를 인륜으로 번역하면 뜻도 잘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헤겔 철학은 ‘매우 진부한’ 철학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인륜이라는 용어는 현대적 문맥에서는 헤겔 철학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므로 오히려 ‘윤리’로 번역하는 것이 헤겔 철학에 의도에 부합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인륜(Sitte)이라는 말은 칸트에 적용되었을 때는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도덕’(Moral)으로 번역된다. 예를 들면 『인륜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 ) 』은 현대 언어로는 『도덕 형이상학』이다.

헤겔과 달리 칸트에서 인륜이 도덕으로 번역되는 것은 헤겔이 말하는 인륜이라는 개념이 칸트와 다르기 때문이다. 칸트는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출발하므로 칸트에서 인륜은 도덕(Moral)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칸트의 이론을 사회철학적으로 확대한 헤겔에서 인륜은 개인과 사회를 모두 포괄하는 도덕 개념이므로 이를 ‘ 윤리 ’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철학의 용법에서 도덕은 주로 개인 도덕을 의미하지만, 윤리는 근본적으로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 즉 사회 및 국가의 윤리라는 의미로 종종 사용된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헤겔을, 개인과 사회, 시민사회와 국가를 모두 포괄하는 진정한 윤리학, 혹은 사회․정치 철학의 창시자요, 집대성자로 간주할 수 있다.

헤겔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들뢰즈 , 네그리 , 바디우

앞서 언급했듯이 헤겔은 우파와 좌파 모두에 의해서, 특히 그의 국가론 때문에 가장 문제 많은 철학자로 간주되어 왔다. 급진적 자유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헤겔을 처음부터 ‘프러시아의 수구적인 보수 철학자’로 낙인찍었다. 그리고 칼 포퍼나 이사야 벌린 그리고 대부분의 보수주의적인 현대적 자유주의자들은 헤겔을 ‘전체주의자’라고 손쉽게 비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인문학계에서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보다는 들뢰즈와 네그리, 바디우처럼 영향력 있는 ‘유명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 자체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 철학자들이 서로 견해가 달라서 서로 서로 비판도 많이 하지만, 헤겔을 비판하는 데서는 완벽한 의견일치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들이 보기에 헤겔은 여전히 목적론적 형이상학자, 전체주의자, 보수주의자인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오히려 반대로 헤겔을 공산주의 이론가로 재해석한다. 이러한 경향 역시 물론 문제다).


헤겔이 쓴 <법철학>의 표지

헤겔의 국가론과 마르크스 , 레닌 , 그람시

헤겔에 대한 오해와 낙인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러한 헤겔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루돌프 폰 하임(R. von Haym)의 『헤겔과 그의 시대에 대한 강의(Vorlesungen uber Hegel und seine Zeit) 』 (1857)이다.

마르크스의 『법철학 비판』도 이러한 헤겔 이미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마르크스와 레닌은 한편으로 헤겔을 정치적 보수주의자라고 철저하게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의 변증법 철학과 여타 사상에 담긴 긍정적 의미와 요소들을 추출하고 계승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철학 노트> 등을 보라).


칼 마르크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마르크스와 레닌에게 있어 헤겔의 국가론(<법철학>)은 그 어떤 긍정적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저작이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부르주아의 철저한 도구였고 철폐되어야 할 근본악에 지나지 않았다. 헤겔 『법철학』의 긍정적 의미를 날카롭게 꿰뚫어볼 수 있었던 『옥중수고』의 그람시도 이 점에서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사야 벌린	소극적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이며 적극적 자유는 마르크스와 헤겔 식의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마르크스 레닌 그람시	국가는 억압적 기구이므로 철폐되어야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국가 폐지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다.
헤겔	소극적 자유는 물론 적극적 자유와 평등이 필요하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서는 “사회적-윤리적 국가”가 필요하다.

헤겔의 국가론과 마르쿠제 , 루카치 , 포퍼

소련과 동유럽 등 과거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여러 폐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구 사회에 많이 알려지게 되면서 헤겔 철학을 진보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이 생겨났다.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이성과 혁명』과 같은 저작에서 헤겔 철학을 진보적으로 해석하고자 했으며 또한 68세대에게 커다란 정신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마르쿠제 역시 마르크스의 이론 틀 속에서 헤겔 철학을 수용했다는 한계를 보였다. 즉 헤겔 ‘국가론’의 긍정적 의미에 대한 언급이 마르쿠제에게 없었다. 『이성과 혁명』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졌으며, 역시 68세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게오르크 루카치(Gyorgy Lukacs)의 『청년 헤겔』 (1948년 출간) 역시 비슷했다.

우리나라에게 잘 알려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칼 포퍼도 헤겔을 보수주의적인 전체주의자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저자이다. 심지어 포퍼는 헤겔과 마르크스 이론을 사실상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열린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다. 포퍼가 헤겔과 마르크스를 명확하게 이론적으로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포퍼에게 중요한 유일한 이념은 자유주의 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후 헤겔을 보수적이지 않은 철학자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경향이 늘어났고 오늘날에는‘진지한 전문적인’ 헤겔 연구자들 중에서 헤겔이 서술한 국가론을 보수적인 혹은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자유주의적 성향의 헤겔 연구자들은 여전히 헤겔 국가론의‘사회민주주의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 철학자들의 공산주의와 헤겔 철학 비판

그런데 특히 프랑스의 스피노자 전문가들 중에서는 여전히 헤겔을 보수적인 철학자로 통렬하게 비판하는 이론가들이 많다. 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의 특징이 스피노자를 공산주의 이론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공정하지 못한 처사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스피노자 철학이 갖는 긍정적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다. 어떻게 스피노자가 공산주의자란 말인가? 물론 철학적 재해석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상가의 철학을 재해석할 때는 그것이 갖는 역사적, 철학적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스피노자에 대한 공산주의적 해석은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해석의 자유를 남용하고 있다!

네그리와 들뢰즈, 마슈레 등 주로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과 그리고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국내외의 몇몇 학자들은 스피노자를 공산주의자라고 ‘억지로’ 해석하면서, 그와 동시에 여전히 헤겔을 ‘보수주의자’로 간주한다.

사실 이는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들이 헤겔이 사회민주주의 정치철학의 선구자라는 것을 알리도 없지만, 설령 안다 하더라도 그들의 관점에서 헤겔은 여전히 보수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사회민주주의는 당연히 보수적인 체제이니 말이다!

프랑스 철학에서 스피노자 연구와 헤겔 철학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므로, 나중에 따로 항목을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헤겔 『 법철학 』 의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

헤겔의 국가론 및 그것의 해석의 역사에 관한 본격적인 상세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특히 헤겔 『법철학』의 사회민주주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몇몇 구절을 그 책에서 인용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사회 성원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정한 생계의 규모는 저절로 정해지기 마련인데, 많은 대중이 그 정도의 생활 수준을 밑도는 상태로 영락하게 됨으로써 정의감이나 준법정신, 그리고 스스로의 활동과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데 대한 자긍심을 상실하기에 이를 때, 이것이 천민(Pobel)의 출현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소수인의 수중에 과도한 부가 집중되는 것을 더욱 용이하게 한다.”(헤겔, 임석진 옮김, 『법철학』 , 한길사 , ξ 244)

“욕구의 체계[시민사회: 나]에서는 각 개인의 생계와 복지는 가능성으로서 있을 뿐 그것의 실현 여부는 개인의 자의나 타고난 특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욕구의 객관적 체계에 의해 좌우된다.사법 활동을 통해서는 재산과 인격의 침해가 제거될 뿐이다. 그러나 법이 특수한 생활 영역에 현실로 등장하면 이러저러한 목적[생계와 복지: 나]을 방해하는 우연성이 제거되고 인격과 재산의 안정이 확고히 지켜지며, 또한 개인의 생계와 복지가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써 특수한 개인의 복지가 권리이며 법으로서 취급되고 또 실현되어야 한다 .”( 『법철학』 , ξ 231,강조는 나.)

“근대 국가의 본질은 공동적인 것이 특수성의 완전한 자유와 개인의 행복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가족과 시민사회의 이익이 국가에 총괄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목적의 보편성은 스스로의 권리를 보존하지 않을 수 없는 특수한 존재의 독자적인 지와 의욕 없이는 전진할 수 없다는 것,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것은 실현되어 있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성도 활력에 넘치는 발전을 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 두 요소가 든든한 바탕 위에서 존속함으로써만 비로소 국가는 각 부분이 조직화한, 참으로 유기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법철학』 , ξ 244, 강조는 나)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헤겔은 자유와 평등,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개인의 특수성과 주체성,그리고 공공의 선, 복지와 정의 등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국가 이론의 틀 속에서 종합적으로 사유하고 있다.

‘ 충분히 좋은 엄마 ’ 로서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 ― 정신분석학적 고찰

각 개인은 성장을 위해 “충분히 좋은 엄마”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각 개인은 타자의 도움 없이 고립되어서는 생존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좋은 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를 요청한다.

“충분히 좋은 엄마”은 아이를 완전히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필요에 응답하는 엄마를 의미한다. 아이는 이 어머니의 도움과 개입을 통해 삶의 안정성과 기쁨을 느끼며 건강한 자기(self)로 성숙해간다.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환경과 대상을 제공하는 “충분히 좋은 엄마”가 없다면 아이는 현재 혹은 미래에 심각한 정신병리 상태(자폐증, 정신분열증, 경계형 장애 혹은 심각한 신경증)에 빠지거나 ‘건강한 자아상’을 얻지 못한다. 삶과 안정성과 진정한 자기를 형성할 수 있도록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는 이 엄마를 위니콧(Winnicott)은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는 물론 성인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는 ‘윤리적인 국가’를 필요로 한다. 각 개인들에게 충분하게 심리적, 물질적 안정감을 확보해줌으로써 불안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 열등감과 패배의식, 격심한 경쟁, 폭력과 공격성, 기만과 부패 등등,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온갖 장애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한 엄마와도 같은 국가 ― “ 충분히 좋은 국가 ” (위니콧, 혹은 클라인), “ 사회적 국가 ” (헤겔) ―를 절실히 요청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위니콧의 개념을 변형해 만든 “충분히 좋은 국가”라는 용어를 앞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물론 “충분히 좋은 국가”라는 용어의 의미가 오직 위니콧의 이론만으로 다 설명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개념이 지닌 정신분석학적, 심리적 함의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가족관계를 넘어 ‘충분히 좋은 엄마 같은 국가’라는 사회이론적 의미로 확대해 사용하고자 한다.

이 개념은 특히 클라인(Klein), 그리고 비온(Bion),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라깡 정신분석이론과 다양한 정신분석가들의 기여를 비판적으로 종합함으로써만 도출될 수 있는 새로운 ‘임상적-정치철학적’ 개념이다.

물론 이것은 철학적 관점에서는 헤겔 철학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용어이며, 궁극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의 실천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용어이다.

아이의 성장 과정에 엄마의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들은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해주며 심리적, 경제적 안정감을 제공해주는 윤리적 국가가 필요하다. 헤겔은 근대 시민사회의 발흥과 더불어 생겨나는 무수한 문제들, 빈부 격차, 자유와 평등의 유린, 천민의 발생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국가’의 존재를 역설하고 그것을 위한 이론적 기초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헤겔은 시민사회(부르주아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줌으로써 시민들의 자유와 자긍심과 애국심, 그리고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국가의 역할로 규정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 충분히 좋은 국가 ’라는 이 개념은 개인과 사회 , 인간의 주체적인 심리적 영역과 객관적인 정치경제의 영역을 연결시켜주며 , 더 나아가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이론적 , 실천적 개념으로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정신분석적 개념을 헤겔이 제시한 “사회적 국가”와 비유적 관점에서 동일한 개념 ― “충분히 좋은 국가” ―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을 통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충분히 좋은 엄마”는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아이를 돌보는 엄마다. 엄마가 아이의 교육과 복지, 행복을 위해 개입하는 것은 아이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아이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알아서 자율적으로 처리하도록, 알아서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개입하여 간섭하지 않는 엄마가 좋은 엄마다.
공산주의	“충분히 좋은 엄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 충분히 좋은 국가도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구일 뿐이다. 엄마(국가) 없이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결합한 비국가적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혹은 공동체만이 공산주의가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결사다.
사회민주주의	민주적, 윤리적 국가는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충분히 좋은 엄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사회적 국가는 개인의 소극적 자유뿐만 아니라 적극적 자유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국가는 빈곤과 고통, 질병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모든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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