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6.25

엘리아스 카네티의 대중 연구와 메르스(MERS) 파동 유감

불가리아 출신의 스위스 문필가 엘리아스 카네티(E. Canetti, 1905-1994)는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데 20년이 넘는 시간을 쏟아 부었다. 군중과 권력(1960)이 바로 그 책이다. 논란거리를 많이 지니고 있긴 하지만, 군중과 권력은 여전히 르 봉(G. Le Bon)의 군중심리학(1895), 프로이트(S. Freud)의 군중심리학과 자아분석(1921)과 함께 군중 혹은 대중(mass)에 대한 탁월한 저서로 남아있다. 르 봉과 프로이트가 주로 사회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으로 대중에 접근했던 것과 달리, 카네티는 철학, 문화인류학, 신화학, 종교학, 사회병리학, 정치학등을 함께 아우르는 복합적인 관점에서 대중을 훨씬 더 포괄적이며 심층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요즘말로 하자면 학문들 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융합 연구’를 시도한 것이다. 카네티의 연구를 이끌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대중의 형성이 문화, 역사,종교의 차이를 막론하고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한, 언제나 등장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란
점이다. 대중은 단지 18세기 이후 현대사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한 마디로 대중은 인류의 숙명이다. 다른 하나는 대중이란 현상을 적절히 이해하려면, 대중을 ‘바깥에서’, 마치 사물을 관찰하듯이 거리를 두고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반대로 연구자는 반드시 ‘안으로부터’, 그러니까 대중에 속해 있고, 이 ‘속해 있음’을 적극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대중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른바 ‘참여 관찰’이 필수적임을 강조한 것이다. 카네티는 이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문명사의 시공간을 거침없이 횡단하면서, 수많은 대중의 유형들을 냉철하면서도 섬세하게 비교, 관찰한다. 이로부터 그는 대중의 네 가지 일반적인 특징을 찾아낸다. 첫째, 대중은 언제나 더 ‘성장하려고’ 한다. 둘째, 대중 안에서는 ‘평등’이 지배한다. 셋째, 대중은 밀도, 즉 서로 ‘밀접하게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넷째 대중은 늘 어떤 ‘방향’을 필요로 한다. 이 네 가지 특징은 어떤 형태의 대중이든, 대중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적 본성이자 근본 성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개인들은 그냥 개별적으로 살아가지 않고 굳이 대중을 이루고, 대중 속에서 살아가려 할까? 대중을 형성하고 이를 견고하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동인은 무엇일까? 카네티의 답변은 간명하고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낯선 것’과의 접촉에 대한 불안, 그로 인해 야기될지 모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모든 인간이 저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는 ‘죽음에 대한 위협과 두려움’이다.
카네티의 통찰을 현재도 진행 중인 메르스(MERS) 파동에 적용시켜 보자. ‘중동호흡기증후군’. 이름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낯설고 섬뜩하게 느껴진다. 보이지 않은 이 괴질 바이러스가 검역 당국의소홀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이후 수 차례 치명적인 관리 실패로 인해 확산 일로에 있다. 처음 언론들이 앞 다투어 치사율이 40%에 달하고 치료제도 없다고 보도했으니, 일반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극에 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행히 치사율이 10% 정도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한다. 10%, 아니 단 1-2%라도 죽음의 위협인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메르스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순식간에 이 잠재적 살인자를 두려워하는 ‘메르스 대중’으로 재탄생했다. 메르스 대중이 된 국민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정확한 정보였다. 그래야 대중으로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감이 잡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에볼라 환자가 발생했을 때, 미 질병통제예방센터가 곧바로 발생 병원, 환자 이름, 주거 지역을 알려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은 16일째 되어서야 메르스 회의를 주재했으며, 정부는 혼란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2주 넘게 모든 관련 정보를 통제했다. 게다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엄벌하겠다는 적반하장의 위협도 곁들였다. 필자에게도 카톡으로 두 개의 병원 리스트와 황당한 예방법이 날아왔다. 이런 부정확한 정보들이 왜 횡횡하게 된 것인가? 전적으로 정부 잘못이다. 정부가 메르스 대중이 요구하는 ‘평등한 정보권’을 처음부터 부당하게 억압했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물론, 과학저널 사이언스 지도 한국 정부가 제대로 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국가안전처가 지난 주 느닷없이 발송한 “메르스 주의사항” 문자메시지는 그 시기와 내용이 한심하다 못해 애처로울 지경이다. 이 문자메시지 다음 날, 정부는 감염 환자들이 머문 24개 병원을 처음으로 공개했는데, 이마저도 날마다 그 수가 늘더니 6월 11일 현재, 40군데를 넘어섰다.
메르스 대중은 국민들이며, 국민들은 공포의 지속을 원치 않는다. 국민들은 생명과 직결된 사안에 도움은 못 줄지언정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는 정부를 원한다. 메르스 대중은 국민 위에군림하는 관료와 정부가 아니라, 자신들을 평등한 주체로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정부를 원한다. 대통령은 틈만 나면 적폐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한국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심각한 적폐는 무엇인가? 바로 국민들을 평등한 주권자가 아니라 관리 대상, 통제 대상으로 여기는 시대착오적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논란도 그렇지만, 메르스 파동은 평등한 대중사회를 위해서 개혁이 가장 시급한 곳이 다름 아닌 청와대와 정부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2015. 06. 11

하 선 규(홍익대 예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