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12.09

천천히 걷기

리듬 (Rhythm) 이란 하나의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다 . 그것은 후기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차이의 반복이며 , 하나의 지점으로부터의 단절임과 동시에 변화와 지속의 이중성으로 중첩된다 . 시간과 공간은 변화하는 리듬 속에서 온전하게 전유될 수 없고 동시성 또한 소유하거나 환원 불가능하다 .

빠르게 흘러가고 변화하는 것들 , 차이와 반복 속에서 소외되고 망각되었던 공백들 , 변화와 지속에서 오인된 기표들 , 자본의 순환이 제국주의적 권력이 되어버린 도시를 따라 상류로 , 상류로 역류하는 불온한 것들의 뒷모습은 마치 나침반위의 텅 빈 시선처럼 천형과도 같은 삶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소요 ( 逍遙 )- 천천히 걸으며 응시했던 사물들 , 고정된 형상과 색채를 품지 않았던 하늘과 구름 , 숲 , 바다 그리고 도시 공간 , 서서히 생장하고 변화하는 생명들의 속삭임과 울림에 마음을 기울이고 바라본다 . 풍경은 나에게 말을 하지 않으면서 말을 건넨다 .

풍경과의 만남

터널 위로 가파르게 치솟은 거대한 설산 , 어느새 다가오던 희미한 풍경이 차츰 내 뒤로 사라지며 다시금 아득해져간다 . 나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던 풍경 , 눈 내린 겨울 산 , 바람에 꺾이고 부서지며 만들어진 나뭇가지들의 굴곡 , 암벽 , 저 멀리 하늘과 땅의 흐릿한 경계가 그려내는 표정에 순간적으로 휩싸이고 몰입했다 .

유유히 멀어져가는 풍경을 서서히 바라본다 . 호흡을 가다듬는다 . 흔들리는 주체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일렁인다 .

말의 홍수 속에서 지시적인 언어의 폭력을 벗어나 , 풍경은 결국 말하지 않는다 . 그물처럼 뻗어가는 관계망 속에 포획당하지 않으려는 날짐승의 심장처럼 벗어나고 달아난다 . 풍경은 그 내부에 그리고 그 외부에 있다 내부의 외부 , 외부의 내부 ,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

상처와 흔적을 품은 풍경의 스펙타클 (spectacle), 파주와 서울 간의 이주와 정주사이에 압축된 시공간을 열어 보이는 사물과 풍경 , 그것들은 도시의 산책자 ( 散策者 ), 잉여물 (object a) 같은 것이다 .

경계 境界

말없이 말하는 경계 , 눈 내리는 설경은 지시적인 언어로부터 무경계로의 이행을 상기시킨다 . 하늘과 땅의 구분조차 사라진 아득한 설산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겹쳐있는 상태 , 무경계 (No Boundary) 란 닫혀있는 상태가 아닌 열린 구조다 . 열린 구조란 완결되지 않은 주체로서 , 대립적인 사유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 나와 타자를 다른 영역에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안에 타자성을 환대하는 태도이다 . 데리다 (Jacques Derrida) 는 환대란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

‘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 는 도가 항상 변화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 사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흐르는 삶의 변화 또한 비가도 非可道 가 되는 것이다 . 따라서 노자는 도는 무한한 것으로서 어떤 규정성도 없다고 말한다 . 그렇기에 한계가 있는 언어로는 이름 지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

우리는 존재하는 유형과 무형을 이야기 할 수 있다 . 그리고 있고 없음은 비움과 채움의 순환적인 에너지의 운동을 유발한다 .

아득한

언어는 이미지를 온전히 포획할 수 없다 .

명료한 언어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

칸딘스키는 불안 , 고뇌 , 감동 등 현대인의 정신이 그대로 표출되는 회화의 방법론을 추구했다 . 물질주의적인 합리성과 차별화 시키는 예술 창조의 원리로서 정신의 비물질적인 상태인 내적필연성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

세잔은 화가에게는 필요한 두 가지를 눈과 정신으로 보았다 . “ 눈으로 자연을 봄으로써 , 머리로는 조성된 감각의 논리로서 작업해야 한다 . 그것이야 말로 표현의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 라고 하였다 .

나는 아득히 멀리보이는 풍경 속에서 탈색된 상태의 백색 회화를 떠올린다 . 소멸의 회화 그리고 소멸의 경계에서 견디고 서있는 마른 나뭇가지 , 땅속에 숨 쉬고 있는 씨앗과 같은 생명의 숭고함에서 삶의 희노애락을 보며 , 그 안에 근간의 나의 회화가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

설산 雪山

폭설이 내리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풍경 .

멀어져가는 기억과 시간의 흐름처럼 적막한 안개 속에 들어와 있는 듯 길 없는 길을 달리는 혼몽 속에 빠져든다 .

겨울 숲은 묵묵하고 고요하다 . 침묵의 시간 , 시린 가슴으로 다가오는 고난의 계절을 버티어낸다 .

인간적인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주변의 환경과 우주의 소리에 공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 그런 의미에서 한 개인이 품은 감성의 연원이 사회적인 영역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느낀다 .

감성은 작품의 근원지이다 .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상태로 이끌리듯 소환되는 것이 창작행위라고 할 수 있다 . 눈 덮인 산 아래를 걸으며 한기로 둘러싸인 거대한 설산을 바라본다 . 거기에는 치열한 생명의 울림이 있다 . 나는 차가운 아스팔트 틈에서 봄이 되면 피어날 들꽃 한 송이를 신비롭게 바라보는 순간을 떠올린다 .

2014 년 겨울 작업노트 중에서 -   한 상 진 (홍익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