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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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옥션갤러리, 반복의 무게- 김인 展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15.05.29 조회수17,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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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인의 고통스러운 희열로서의 반복 

미술평론가 이윤희



 김인의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은 지난 2009 대전시립미술관에서 개최했던 전을 통해서였다. 큰 화면에 서로 연관되지 않는 사물들을 잔뜩 흩어 놓은 그의 작품은, 첫 눈에는 당시 젊은 작가들이 한국미술계의 상업주의 바람에 부응하여 쏟아내던 아시안 팝 계열과 유사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달라 보이는 면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사물의 표면을 그리고 있지만, 화면 속의 사물과 사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불꽃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아주 말할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것을 꾹 눌러 견디고 있는 사람의 그림처럼 보였다. 그림 속의 무분별한 사물들, 그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수인을 하고 있는 부처상이든, 덤벨이든, 닭다리이든, 검은 비닐봉지이든, 목이 잘린 인형이든, 미끄럼틀이든, 그것들은 문장이 되지 못하는 말더듬이의 단어들처럼, 입안에서 맴도는, 터져 나오기를 김인의 고통스러운 희열로서의 반복 미술평론가 이윤희 기다리는 의미들의 편린들처럼 보였다. 혹은 그와는 정반대로, 사물들을 흩어놓음으로써 많은 말을 하고 싶은 자신을 스스로 고요히 평정시키는 것 같은 극기의 기운 같은 것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작품에 대한 그러한 감흥 을 가지고 대면한 김인 작가는 반짝이는 눈매가 날카롭고 차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를 직접 만나기 전, 과거 그의 기행에 대한 소문들이 들렸다. 마치 내일 따위는 없다는 듯이 살아왔던 그의 행적들은 어디까지 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각색인지 알 수 없지만, 그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는 경북 김천 태생이지만 공교롭게도 대전의 충남대 미대 서양화과에 진학하였고, 인생의 과정을 거슬러 다른 가정을 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선택은 그의 삶 속에서 일종의 함정이 되었다. 그의 삶은 상처에 상처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난을 짊어진 집안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이라는 현실성과 는 거리가 먼 선택을 하면서, 타향으로 기대에 찬 발걸음을 옮겼던 그에게 당시 그곳의 현실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이미 씻을 수 없는 가난이라는 부조리함을 겪고 있었던 그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부당함과 불의는 표출하지 않을 수 없는 울분으로 전화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 계통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젊은이 특유의 치기와 예술적 감흥이 빚어내는 재미난 기행이 있지만, 그의 행적에는 비장함만 있고 유머가 없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머로 승화시키기에는, 자신의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처럼 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고 수줍어하는 편이었는데, 그런 내성적인 면과 현실적인 폭발력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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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나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선택하는 말들이 어쩌면 상당한 문학적 취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스스로 부여하는 의미를 이야기 했는데,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쉽게 빠질 수 없는 감정의 부풀림을 극도로 자제하고, 의미의 과장 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빈 화면 을 대할 때 어떤 심정이 든다던지, 자신의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사물들이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던지, 그림을 그리는 순간들에 자신을 사로잡는 생각들 같은, 과장이 섞여 들어갈 여지가 없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것이었다. 이 부분 역시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 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대개 당대 미술의 화두를 어떻게 개인적으로 풀어냈는가에 대한 논리의 갑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빈 화면 앞에서 붓을 들어 그것을 채워 나가는 과정을 작품에 대한 주된 설명으로 채택하는 김인 작가의 서술 방식은 참으로 솔직하고 소박하면서도 다른 한편 아무도 모르는 내밀한 자신감의 소산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술 내적인 이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특정한 관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일종 의 철학적 사유를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다시 그의 작품을 만난 것 은 그로부터 몇 년 후, 2014년이었다. 그는 여전히 여러 가지 사물들을 그 리고 있었지만, 과거와는 달리 하나의 사물을 한 화면에 빼곡히 채워 넣는 반복의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과거의 작품이 무한한 공간에 연관성이 없는 사물들이 둥실둥실 떠 있는 모습이었다면,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작품들은 특정한 사물의 전체 혹은 부분들이 종횡으로 질서정연하게 반복된 형국이었고, 색채 또한 상당히 제한되어 있어서 거의 무채색으로 보이는 작품들 도 여럿이었다. 동일한 형상을 한 화면에 집적하고 반복하는 것은 저 유명 한 미국 팝아트의 앤디 워홀(Andy Warhol)이나 프랑스 누보 레알리즘 계 열 아르망(Arman)의 작품들에서 흔히, 대량 생산된 물건을 대량 소비하는 현대사회 대한 은유로서 보여졌던 방식이다. 그런데 일견 유사해 보일 수도 있는 앞선 역사 속의 이 대가들의 작품과 김인의 것이 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는, 반복의 방식과 반복되는 사물의 정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하는 사물들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자신의 생활공간 속에서“ 발에 채이는”것들이다. 집안이나 작업실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들, 아들이 방학숙제로 플라스틱 폐기물 등을 재활용해 만든 얼룩소, 햄버거를 먹으면 사은품으로 주는 작은 인형, 떨어져나간 아톰의 주먹, 떨어져나간 조화(彫花) 한 송이 등인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한마디로 개인적인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집밖으로 던져졌을 때 한 푼의 교환가치도 발생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가치의 차원에서 보자면 무가치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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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환전 될 수 있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사물이 귀한 것들이며, 대 개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에너지와 시간을 돈과 바꾸면서 살아간다. 매스미디어는 새로운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의 정당성을 부 추기고, 훌륭하게 잘 만들어진 물건들을 가리켰던‘명품(名品)’은 어느새 값비싼 몇몇 브랜드의 상품들을 통칭하는 명사로 기능하고 있다. 미술 작품이 그런 현상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에 대한 답은 물론 간단한 것이 아니 지만, 다이아몬드를 번쩍번쩍하게 그려내는 작품들이나 명품 가방을 그리 는 그림들이 이 시대의 상서로운 상징으로 미술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현상은 그저 코웃음을 칠 일만은 아니다. 사물을 숭배하는 것 같은 시대이지만, ‘돈’이라는 무시무시한 매개체를 거칠 수밖에 없는 시대의 구조로 인해, 인간과 사물은 의외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김인이 선택하는 사물들은 작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사물들 이다. 작가가 처한 시간과 공간의 소산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부산물로서의 사물들, 자신과 타인이 맺는 어떤 관계를 연 상시키는 사물들이 그의 주된 소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전혀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저항적 메시지가 읽힌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접촉하는 사물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사물을 바라볼 뿐 아니라 사물이 자신을 응시하는것 같은 체험은, 그가 사물을 대하는 방식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는 삶과 예술의 관련성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초이다. 작가와 직접적 관련을 맺는 사물들이 반복되는 것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일상의 반복성에 대한 은유로 읽혀진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다 를 바 없이 반복되리라는 예상,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껍질을 죽을 때까지 뒤집어쓰고 살아가게 될 것이 분명한 삶의 조건에 대한 생각들은, 일견 무가치해 보이는 사물들의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반복 패턴을 염두에 두게 된 계기가 불교 사찰의 천불좌상 이었다는 점은 또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 김 천 직지사의 천불좌상으로부터 반복적 배열의 화면 구도에 대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천개나 되는 소형 좌불들이 의미하는 바,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이들만이 누리는 것이 아닌, 미물까지도 포함한 세상만물이 부처가 될 수 있는 평등의 세계를 그는 은연중에 염두에 두었을 지도 모른다. 때 묻은 장난감들아, 목이 떨어진 꽃송이들아, 누구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세상의 모든 것들아, 너희들의 삶은 나와 같구나, 하는 깨달음. 그러나 그는 반복적 패턴을 왜 그리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집에 돌아와 소주 한 잔에 깊게 생각해 보면”,“재주 없는 무명의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를 괴롭히는”일 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하기 위해 지긋지긋한 반복을 지속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늘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김인의 답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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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삶 속에서 예술은 지긋지긋한 희열이다. 둥둥 떠다니는 예술의 세계를 잡아 현실에 앉히는 작 업, 괴로운 반복 가운데서 어느 순간 피어오르는 의미의 세계는 고통의 기쁨일 것임에 분명하다. 삶과 예술의 분리 와 그것의 재합일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지난 세기 내내 논의되어 왔고, 동시대의 미술이 삶의 구체성 속에 안착되었다고는 그 누구도 감히 말하지 않는다. 구약의 바벨탑처럼 구토가 날 것 같은 높이까지 하늘을 찌를 듯 한 성을 쌓았으나 그 댓가로 서로 소통될 수 있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김인의 작품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그가 하늘 높이를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 신의 발이 내딛는 반복적인 걸음걸이, 그 발 주변에 있는 것들, 자신의 발과 함께 걷고 있는 발들의 세계로부터 그 의 작품이 출발한다는 것, 그것이 현재 그가 지속하고 있는 반복된 이미지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의 단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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